제이미슨 그리어(오른쪽) 미국 무역대표부 대표가 15일 애스펀 안보포럼 대담에 참여 중이다. 김경준 기자
제이미슨 그리어 미국 무역대표부(USTR) 대표는 미국이 한국을 비롯한 교역 상대국에 대중국 투자심사와 수출통제 공조를 요구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미국 시장 접근권을 유지하려면 단순한 시장 개방을 넘어 중국 자본과 제품의 우회 진출을 차단하는 경제안보 정책에도 보조를 맞춰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어 대표는 15일 애스펀 안보포럼 대담에서 “미국과 무역관계를 맺고 시장 접근의 혜택을 받으려면 미국과의 교역이 미국의 국가안보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이 한 국가와 무역협정을 체결한 뒤 제3국이 해당 국가에 대규모 생산시설을 구축하고 미국 시장으로 우회 진출하는 상황을 허용할 수는 없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무역협상에서 상대국의 외국인 투자심사 제도를 주요 조건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설명도 내놨다. 중국 자본이 협정 상대국에 생산기지를 세운 뒤 관세나 수출 규제를 피해 미국에 진입하는 것을 차단하겠다는 취지다.
그리어 대표는 “상대국이 어떤 투자와 제조업 활동을 받아들이는지 살펴보고, 그것이 미국과 해당 국가의 공동 이익에 부합하는지 확인해야 한다”고 말했다. 첨단기술 수출통제에 대해서도 “미국이 최첨단 제품을 공급한다면 상대국도 미국과 같은 위협 인식을 공유하고 적절한 통제체계를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이 같은 요구가 한국과 일본, 유럽 등 동맹국에도 적용되느냐는 질문에는 “그렇다”고 답했다.
다만 미국과 중국 가운데 한쪽을 선택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그는 “중국은 다른 국가에 선택을 요구하지만 미국은 그렇지 않다”며 “미국 시장에 수출하려면 공급망과 안보를 보호하는 합리적인 조치를 취해야 한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발언대로라면 대중국 생산·수출망 의존도가 높은 한국은 반도체와 배터리, 자동차 분야에서 중국 투자와 기술 이전을 제한하라는 미국의 요구를 받을 가능성이 커진다.
그리어 대표는 중국산 제품의 제3국 우회 수출 문제도 지적했다. 그는 “중국에서 들어오는 제품을 통제하면 기업들은 멕시코 등 다른 국가를 이용하려 한다”며 “무역은 한쪽을 누르면 다른 쪽이 튀어나오는 풍선과 같다”고 말했다.
이어 미국·멕시코·캐나다협정(USMCA) 재검토 과정에서 자동차뿐 아니라 반도체와 의약품 등으로 원산지 규정을 강화하는 방안을 멕시코와 논의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에서 더 많이 생산하고 일부 분야에서는 멕시코와 상호보완적으로 생산할 수 있지만, 이를 위해서는 강력한 원산지 규정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즉, 멕시코에서 생산한 한국 기업 제품도 북미산 부품 비율을 충족하지 못하면 미국 수출 시 무관세 혜택을 잃을 수 있다. 원산지 기준이 반도체와 배터리 등으로 확대되면 한국·중국산 부품을 북미산으로 교체하거나 현지 생산을 늘려야 해, 조달비용과 생산 부담이 커질 전망이다.